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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오늘 같은 밤이었어. 그날두 이렇게 달이 징그럽게 밝았으니께. 희다 못혀서 파르스롬한 빛이 그 넓은 목화밭에 비단처럼 깔리는디 참 환장하것더라구. 노랗구 허옇게 피어난 꽃은 말할 것두 웂구, 막 깍지를 까구 시상에 얼굴을 내민 목화솜에도 퍼런 달빛이 얹히니께, 그 뭐시냐. 애머랄두? 아녀, 루빈가? 암튼 뭐 그런 보석이 따루 웂더라구. 그게 보기 좋아서 환장혔냐구? 안 그랬다구 허긴 좀 거시기 허지만, 마냥 좋기만 헐 수 있나. 오밤중에 남의 밭에서 목화 도둑질을 허는 처지니…. 깜깜혀야 안 들키는디. 밝을수록 가심이 두근세근 방맹이질 허지. 더구나, 그 목화밭이 혹부리영감네 밭이었거든. 그 냥반이 보통 숭악혀? 목화 따다 들키는 날엔 다리몽뎅이 부러지는 건 아무 것두 아니구 동네에서 쫓겨날 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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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째서 목화를 도둑질허냐구? 아, 이 사람아. 그걸 심심파적 놀이 삼어 했것남? 오죽혔으면 남의 밭에 들어가겄어. 바늘 꽂을 땅 한 평 웂는 집이서, 아버지 일찍 여우구 병든 홀엄니 모시고 살라니께 연명할 방도가 있으야지. 처녀 몸뗑이구 뭐구 이 집 저 집 날품팔이 혀서 입에 풀칠은 허것는디, 병든 엄니 약값을 대야 허니…. 그려서 엄니가 평생 업으로 삼었던 질쌈이라두 헐라는디, 남은 밭뙈기까장 팔아먹은 뒤니 그놈의 목화가 워디 하늘서 떨어지남. 목화가 있으야 솜 맹글어 실두 잣구 무명을 짜지. 메칠 고민허다가 결국 솜이 다 피지두 않은 넘의 집 목화밭에 들어간 겨. 지금 생각허먼 내가 미쳤던 게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두 그러질 말아야는디, 그 벌루다가 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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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디, 달빛이 도깨비마냥 사람 맴을 홀린다는 말이 사실이긴 헌개벼. 그날 내가 제 정신이 아녔으니께. 아, 이 사람이 워째 장기 두다 장이 갔다 온 사람마냥 딴소리를 헌다나? 온제긴 온제여. 달빛이 징그럽게 내리던 그날 밤이라니께. 그날 저것, 두식이 아배를 만났으니께. 에구, 퇴깽이 같은 내 새끼, 잘두 자네. 내가 저눔으 자석 땜이 속이 상허니께 별 말을 다 허네. 죽을 때꺼정 가슴에 묻었다가 흙속으로 데꾸 갈라구 혔던 얘긴디. 징글맞은 달빛 때문이여. 암튼지간에 이 말은 자네헌티만 허는 겨. 그러니 절대 입밖으루 내지 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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츰엔 동구 밖에 서 있는 장승이나 삼불산 미륵부처가 걸어오는 줄 알었네. 금빛마냥 쏟아져 내리는 달빛을 그득허니 등에 업구, 지드란 그림자는 땅에 깔고 전봇대만헌 게 뚜벅뚜벅 걸어오는디, 대체 그게 꿈인지 생신지…. 그러잖어두 목화 도둑질 허느라구 간이 콩알만큼 쪼그러 들었는디. 느닷웂이 그런 모냥을 보니, 거품 물고 기함해버리고 만 게지. 한참 뒤 정신을 차리구 보니께 사내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날 내려다보고 있지 않겄나. 장승두 부처두 아닌 사람인 건 확인혔는디, 얼마나 허우대가 장엄헌지 냇가 미루나무가 와 앉아 있는 줄 알었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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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판서 일 허는 황씨 총각이라는 걸 알아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었네. 이 동네에는 그렇게 큰 사람이 웂었거니와, 전에두 그 총각을 몇 번 본적이 있으니께. 그 때가 바루, 저 송우산 아름드리 소낭구들을 비내느라구 큰 산판이 생겼을 때였으니께, 외지서 인부들이 많이 들와 있었지. 자네 시집 오기 한참 전이니께 잘 물르지. 그런디 이상헌 건, 다른 인부들은 전부 산판서 가까운 웃골에서 먹구 자는디, 그 황씨 총각만 이 동네에 와서 밥을 붙여먹구 살았다는겨. 그것두 승질 드럽기가 염라대왕 싸대기를 후려갈긴다는 혹부리영감네에 말여. 오죽허먼 그 황씨 총각이 혹부리영감 싯째딸헌티 눈독을 들인다는 소문이 동네에 짜허게 돌았겄남. 원체 키두 헌칠헌디다 인물두 깎아논 밤처럼 훤허게 생겨서 입맛 다시는 사람이 한 둘이 아녔지. 그날두 그 사람이 다른 일꾼들허구 술추렴을 허구 자러오는 참에 목화밭에서 사람 기척이 나니께 와본 것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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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서 그날 밤에 뭔 사단이 났느냐구? 이 사람이 참…. 쑥씨럽게. 뭐시여? 말이먼 다 말인 줄 아는 겨? 혹부리영감헌티 이를까봐서 거시기 헸냐구? 허참 기가 맥혀서. 목에 관운장 청룡언월도가 쌍으루 들어와두 그건 아닐세. 자꾸 그르케 애먼소리 허먼 얘기구 뭐구 때려 치구 잠이나 잘 텨. 그려, 진즉 그럴 것이지. 글쎄…. 나두 모르겄네. 강제로 그리 된 것두 아니구, 그렇다구 내가 옷고름 풀구 밭고랑에 나자빠진 건 더욱 아니니…. 울 엄니가 날 그리 허투루 갈치진 않았응께. 그러니 그저 모른다구 헐 수밖에. 굳이 핑계를 댄다믄 달빛 탓이라고나 헐까. 사람을 홀릴만큼 황홀했으니께. 땅꾼 만난 배암이나 배암 만난 개구락지마냥 꼼짝헐 수 웂었다는 기억만 또릿허네. 나중에 정신채리구 나서 달빛에 비친 내 몸뚱아리가 월매나 부끄럽던지. 지금도 그 생각만 허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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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구 나서 열한 달 만에 낳은 게, 저 애물단지라네. 오매 뱃속이 뭐 그렇게 좋다구 열한 달씩이나…. 근디 남들은 열 달을 못 채우구 나와두 야물기가 밤톨 같은디 저것은 워찌 된 것이 한 달을 더 있다 나왔는디두 저 모양인지. 커나먼서 말이나 걸음이 늦는다는 생각은 혔지만, 애덜 크는 거야 오이 자라듯 제 각각이니께 큰 걱정은 안혔지. 그런디 네 살이 되구 다섯이 되구, 지 애비 지게를 끌구 댕길 나이가 되두 영 어린애 짓만 허는겨. 내가 션찮은 애를 나놨구나 하는 걸 받아들일 수밖이 웂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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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아버지? 결국 그 얘기까지 허게 되는구먼. 데쳐논 호박잎마냥 시들어가던 울 엄니가 돌아가시구 나서 얼마 안 있다 떠났지. 죽었냐구? 아녀, 그건 아니구. 엄니 장례를 치루구는 장작을 산데미처럼 패놓구 뒷간두 치구 울바자두 손 보구 부지런히 집안일을 하더라구. 않던 짓이니께 뭔가 이상하단 생각은 혔지. 그러던 어니 날 새복에, 부시럭 부시럭 소리가 나서 잠이 깼는디, 그 사람이 문을 열구 나가더라구. 문을 나서다 말구 방안을 한참 쳐다보대. 그 순간 느닷웂이 그런 생각이 들더구먼. 저 사람이 떠나는구나. 그런디두 잡을 수가 웂었네. 언젠가 그런 날이 있을 거라구 각오하고 살었던 셈이네. 그 새복,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구는 소리죽여 우는 것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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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오래 버틴 셈이었네. 그나마 새끼를 낳아놨으니 못 떠나고 그리 질게 맴돈 것이었지. 들짐승을 집에 가둬놓는다구 집짐승이 되든가. 애당초 워디 뿌리박구 살 사람이 아녔어. 산판마다 쫓아 댕기먼서 이리저리 떠도는 맛으루 사는 사람이었응께. 시상 워디나 늘 그렇게 바람 같은 사내덜이 있잖은가. 훗날 누가, 어디 어디 산판에 애 아버지가 있더라구 전해줬을 때두 안 찾아갔네. 그 사람 뒷덜미를 끌구 올 자신두 웂었지만, 설령 끌구온다구 혀두 눅진하게 녹인 엿마냥 늘어붙어 있을 사람두 아니니께. 그렇게라두 소망대루 살먼 됐다 싶은 생각이 들더구먼. 원망해본 적? 웂네. 길진 않었어두 내 평생 누릴 행복은 다 누린 셈이니께. 반편이나마 저 두식이 크는 거 보먼서 살게 해줬으니 그 또한 고마운 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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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두 내겐 금쪽같은 새끼 아니것나. 그런디 그 빌어 처먹을 눔덜이…. 어이구, 억장이 또 무너지네. 이눔의 눈물은 왜 요래 시두 때두 웂이…. 저게 잘못되먼 내가 워찌 살어. 누구긴 누구 것나? 지 할애비 꼭 닮은 혹부리영감네 손자 영석이란 눔이지. 그 호랭이두 안 물어갈 눔 허는 짓이 똑 놀부잖는가? 호박밭에 말뚝 박구 똥 누는 애 주저 앉힌다더만, 그 못지않게 심술루 그득헌 눔이지. 그려, 남의 귀헌 자식헌테 우째 그걸 멕이누 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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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랄 게 뭐 있겄나. 메칠 전에 두식이가 국민핵교 애덜 갈소풍 가는델 따러 갔었내벼. 재? 2학년 댕기다 말았잖여. 학교 댕기는 거버덤 개구락지 잡구 머루 따는 걸 더 좋아허는 눔이니께. 그리두 소풍 가는 건 부러웠던 모냥이지. 짐승마냥 싸댕기는 눔이니 가는지 마는지 워찌 알었겄나. 아무튼 게서 애덜 먹는 솜사탕을 읃었던가 줏어먹은 모냥인디, 그 맛을 못잊구 솜사탕 사달라는 말을 입에 달구 댕기대. 헌디, 돈두 돈이지만 이 골짜기서 솜사탕장수를 만날 수 있남? 그게 화근이었던 게지. 솜사탕을 염불허구 댕기는 걸 영석이눔이랑 똘마니 멫눔이 본 모냥이여.

아, 글쎄. 애를 데리구 목화밭에 가서 목화를 멕였다네. 왜 애덜 때야 목화다래를 따먹을라구 목화밭을 자주 드나들잖남. 꽃이 지고 스무날쯤 지나믄 다래가 손톱만 허게 크는디, 그때 까먹으먼 들큰한 게 올마나 맛있나. 그려. 그렸지? 자네두 많이 먹었지? 촌에서 그거 안 먹구 큰 애덜이 멫명이나 되겄어. 목화라는 게 7월이먼 꽃이 피기 시작허는디, 가을에 하얀 목화송이가 벌 때까지 쉬잖구 꽃피고 다래 맺고 허지 않는감. 벌 나비가 웂어도 열매를 맺는 게 목화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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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디 워째 얘기가 일루 빠졌댜? 내가 워디까지…. 아참, 그려. 그런디 이 급살 맞을 눔덜이, 우리 두식이헌티 다래가 아니라 깍지서 나온 솜을 멕인겨. 그게 솜사탕이라구 꼬드겨 갖구. 이 미련탱이가 그게 워쩐 것인지, 뭔 맛인지두 물르먼서 꾸역꾸역 먹었내벼. 나중에 들으니께, 계속 먹으먼 솜사탕처럼 단맛이 나온다구 해서 그렸다는 겨. 더구나 안 넘어간다구 도리질을 허니께, 이눔덜이 작당허구 입에 집어쳐늫기까지 혔다네. 최 주사네 밭을 매구 있는디 한 녀석이 쫓아왔지 뭐여. 두식이가 다 죽어간다구. 부리나케 쫓아가보니께…. 애가 벌써 숨이 넘어갔어.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구 눈은 허옇게 뒤집었구. 하늘이 무너지대. 혀라두 물구 같이 죽어야 쓰것는디 그리두 혹시 살릴 방도가 웂을까 혀서 울먼서 문질르구 뒤집어보구…. 그런디 마침 벌려진 입 속에 솜이 가득헌 게 보이는겨. 볼 것두 웂이 손가락을 집어느서 끄집어냈지. 올마나 많이 쳐늫는지 한 주먹이나 끄내니께 그때야 숨을 돌리는디…. 목화밭이서 생긴 눔이 워째 또 목화밭이서….

뭔 달이 이렇게 밝댜…. 징글징글 헌 거, 오늘 밤두 실타래마냥 질기두 허것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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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혜 2010/03/05 06: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벽녁 자료 찾다가 들린 어느분의 블로그에서 인터뷰 내용을 보고 찾아 왔습니다 섬찟 놀랐습니다 수 년전 헤어진 친구를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듯 세상이 참 넓고도 좁다는 생각을 하고 갑니다
    여전 하심 이 참 보기 좋습니다
    화이팅~~!! 외쳐 드리고 갑니다,,

    • sagang 2010/03/05 14:3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귀한 손님이 다녀가셨군요. 자주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살아내면 조금씩 여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늘 그 기대는 무너지고 마네요.

      그래도 이렇게 반가운 분들을 예기치 않게 만나는 것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찾습니다. 인연에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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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줄기를 훑어 올라온 털이꾼들의 기척이 턱밑에 있다. 이젠 막바지다. 어디선가 꿩이 튀어오를 것이다. 오늘은 장끼라도 몇 마리 건지려나. 새벽녘에 꾼 꿈이 제법 괜찮았다. 산마루에 세워놓은 장승처럼, 꼼짝 않고 서 있던 봉받이(매를 부리는 사람, 매받이라고도 한다) 김 영감이 가볍게 몸을 떤다. 수십 년 동안 이런 순간 속에 서 있었건만, 긴장은 늘 같은 무게로 전신을 훑는다. 어쩌면 통증, 아니다, 쾌감에 가깝다. 그는 잠깐, 이 순간 때문에 매를 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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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버렁이(매를 받을 때 발톱으로부터 팔목을 보호하기 위해 끼는 두터운 장갑)에 박제처럼 앉아 눈만 굴리고 있던 참매 수지니도 몸을 한번 푸르르 턴다. 이 녀석도 긴장이란 걸 하는 것일까. 순간 김 영감의 머리가 곤두선다. 예감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다. 털이꾼들의 함성이 먼저였는지 푸드득!! 소리가 먼저였는지는 모른다. 수탉만큼 큰 꿩이 하늘로 치솟는다. 새삼 당황할 건 없다. 김 영감이 팔을 가볍게 앞으로 민다. 입에서는 “매 나간다!!!”하는 소리가 터진다. 수지니가 버렁이를 박차고 오른다. 마치 힘껏 던진 돌멩이 하나가 하늘로 풍덩 빠져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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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도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 같다. 구원의 빛이라도 갈구하듯 높이 솟구쳐 오른다. 하지만 하늘로 솟든 땅으로 꺼지든 놓칠 수지니가 아니다.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하는 것 같더니 총알처럼 목표물을 덮친다. 두 마리의 날것이 교접이라도 하듯 공중에서 엉킨다. 꿩의 깃털이 흩날린다. 둘은 곧 한 덩어리가 된 채 숲으로 곤두박질친다. 김 영감이 그들이 떨어진 방향으로 달려간다. 털이꾼 두엇이 뒤를 따른다. 그나마 가까운 곳에 떨어져 다행이다. 꿩이 멀리 날아간 뒤 매가 덮쳐버리는 날에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멀리 떨어지면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방향을 잡고 쫓아가보지만, 도착했을 땐 수풀 속에 잠긴 뒤니 어디 박혀있는지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런 때 유용한 것이 시치미(매 주인의 이름표. 꽁지 털 속에다 네모꼴의 뿔과 빼깃을 단다)와 함께 달아둔 방울이다. 쫓아가다가 방향을 잃게 되면 잠시 귀를 기울여 방울 소리를 찾는다. 매가 날카로운 부리로 쪼면 꿩이 몸부림치고 그때 방울이 울린다. 사냥꾼이 일찍 도착하면 살아 있는 꿩을 빼앗아 낼 수 있지만, 웬만큼 늦으면 꿩은 많이 상해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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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다. 몇 번 쪼이긴 했지만 비교적 성한 걸 건졌다. 많이 늦을 땐 매가 저 혼자 포식하고 날아가 버리는 수도 있다. 매는 아무리 잘 길들여도 배가 부르면 사냥을 안 하거나 달아난다. 어쩌면 매란 녀석은 사람에게 길들여지는 게 아니라 단지 먹이에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허기질 만큼 먹여야한다. 김 영감이 허리에 맨 먹이주머니에서 닭다리를 꺼내 수지니 부리에 들이댄다. 그러면서 서서히 꿩을 빼내기 시작한다. 떼어낼 때에는 꿩을 쥔 다음 조금씩 빼앗아야 한다. 사냥을 한 매는 발톱에 온 힘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마구잡이로 잡아당기면 발톱이 빠져 버리기도 한다. 김 영감의 얼굴에 미소가 흐른다. 떠오를 때 얼핏 본 것보다 꿩이 소담지다. 역시 꿈 덕 좀 보려는가 보다. “여남은 마리는 잡을 수 있으려나.” 혼잣말이 꽤 호기롭다. 열 댓 마리까지 잡은 적도 있었다. 이젠 꿩도 적어졌고 전만큼 흥도 오르지도 않는다. 김영감이 수지니 다리에 맨 끈을 감아쥐면서 닭다리를 입에서 떼어낸다. 사냥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먹이를 빼앗긴 수지니가 못마땅하다는 듯 푸르르 몸을 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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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인 매를 날려 보내 꿩이나 토끼 등을 잡는 것을 매사냥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방응(放鷹)이라고도 했다. 매사냥의 역사는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해서 중국, 한국, 일본, 유럽 등으로 전승되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생계수단으로 매사냥을 했으며, 삼국시대에는 왕족 및 귀족들이 레저로 즐겼다. 고려시대에는 매의 사육과 사냥을 전담하는 응방(鷹坊)까지 설치했는데, 충렬왕은 매사냥에 빠져서 민간에 피해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왕조실록에 응방과 응방군까지 언급된 걸로 볼 때 매사냥이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태종은 매사냥을 자주 즐겼으며, 연산군 때는 매사냥 때문에 백성이 고통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종 때는 일부 폐지하기도 했지만 민간의 매사냥은 금지하지 않았다. 후대로 가면서는 일반 백성의 놀이문화로 정착되어 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자료에는 매사냥 허가를 받은 사람이 1,740명에 달했다고 기록돼 있다. 매사냥에 쓰는 매는 크게 매목의 매과와 매목 수리과 두 분류로 나눈다. 일반적으로는 두 분류를 합쳐서 ‘매’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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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매과는 송골매인데, 날개폭이 좁고 길이가 길어 빠른 스피드가 주특기다. 공중에서 급강하하여 사냥감을 채며, 날면서도 먹이를 뜯어 먹는 습성이 있다. 또한 부리에 포유류의 송곳니와 같은 한 쌍의 치상돌기(부리칼)가 있어 일격에 사냥감의 목뼈를 부러트려 즉사 시킨다. 수리과를 대표하는 것은 참매(보라매)다. 날개폭이 넓고 길이가 짧아 장애물이 있는 산속이나 들판에서 사냥을 잘 한다. 이 매는 지상에서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냥감의 숨통을 쥐고 질식시킨 뒤 부리로 가슴팍을 뜯어내고 심장을 터트려 죽인다. 송골매는 거의 사라져버리고 요즘 매사냥은 대부분 참매를 길들여서 쓴다.
매사냥꾼들은 매를 잡는 것을 ‘하늘에서 받는다’고 한다. 가을걷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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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뒤 날을 받아 목욕재계하고 제를 올린다. 매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 기둥을 세우고 그물을 쳐야한다. 미끼는 살아있는 비둘기를 쓴다. 보이지 않게 숨어서 비둘기 다리를 묶은 끈을 2~3분에 한번 씩 당겨줘야 한다. 매는 경계심이 많기 때문에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시간이 마냥 길어질 수도 있다. 경계가 풀린 매가 어느 순간 비둘기를 덮치면 그물에 걸린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놀라지 않게 눈을 덮어주고 매를 보내준 하늘에 감사를 드린다.
이 땅에 남아있는 전문 매사냥꾼(응사 鷹師)은 단 2명이다. 그 중 하나가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8호 매사냥 기능보유자인 박용순씨다. 그는 대전시 동구 이사동에 고려응방을 열고 매사냥을 전승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산에 놀러갔다가 새매새끼를 주워와 기르기 시작한 게 40년 인연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매에 대한 사랑과 매사냥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응사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연을 좋아하고 매와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될 수가 없지요.”
평생을 매와 함께 해온 박용순씨. 매를 손 위에 올려놓은 그와 마주 서 있으면 사람이 매인지 매가 사람인지 혼돈스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매에 ‘미친’ 가장과 살아간다는 건, 가족들에게는 불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생업이 안 되니 가족들이 좋아할 리 없지요. 한 때는 마누라가 '매하고 살라’면서 이혼하자고 합디다. 허허”
매는 국가에서 지정한 천연기념물이다. 그래서 잡거나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 무형문화재인 박용순씨조차 관리자 자격으로 임시로 맡아두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일반인들이 매사냥 자체를 배우려고 해도 배울 방법이 없다.
“매사냥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풍류이자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민속입니다. 수천 년 동안 위로는 왕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즐겨오던 것이지요. 그 명맥을 이어 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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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제가 할 일입니다.”

그의 소망은 매사냥을 조건부로라도 허용해달라는 것이다. 즉, 일정한 시설을 갖추고 교육을 받은 사람에 한해 매사냥을 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한다.
“지금의 청소년들이 할 수 있는 레저 활동이 뭐 있습니까? 그러니까 기껏 PC방이나 틀어박혀 있는 것이지요. 그 아이들을 들과 산으로 불러내어 심신수련을 할 수 있도록 하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걸 위해 10년 넘게 쫓아다녔는데, 그때마다 공무원들은 ‘억울하면 법을 만들어라’고만 합디다.”
어차피 매사냥이 화려하게 부활하는 날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매도 드물거니와 설령 있다고 해도 매를 받고 길들일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 더구나 바쁜 요즘 사람들이 엽총을 놔두고 매사냥에 매달릴 턱이 없다. 하지만 이 땅에 긴 세월동안 매사냥이란 게 존재했다는 걸 후세에 전해주고자 하는 목소리가 그냥 스러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참고자료 : 한국전통매사냥보전회
사진제공 : 서울신문 안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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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만석 2010/02/22 08: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허.....매사냥이 이렇게 깊은 깊이가 있었군요.....
    매번 느끼지만, 세상은 참 넓고 깊습니다.
    명절은 잘 보내셨는지요?
    안주영 기자님은 제 시상식 때 사진을 찍어주신 분이네요, 반갑습니다.

    • sagang 2010/02/22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주영 기자와 그런 인연이 있군요. 저도 지난 겨울 가장 추운 날 매사냥 사진을 찍으러 갔습니다. 막상 사진을 찍으려는데 카메라가 고장 나고 말았지요. 카메라가 오래돼 좀 낡기는 했지만 처음 있는 일이라, 아 인연이 아니었나보구나 했지요. 내년 겨울을 기약할 생각입니다. 잘 지내시지요?

  2. 구봉정 2010/02/22 2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롭고 재밌는 매사냥입니다^^ 사냥하는 매의 포스가 적나라하게 표현이 잘 되었네요. 이참에 새사진으로 나가셔도 되겠는걸요.
    매(송골매)는 매과에 속하는데 왜 같은 항렬인 새매와 참매는 수리과로 나누었는지 그게 참 아리송합니다. 영명이나 학명을 봐도 그럴 만한 이유나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네요(머리가 딸려서)ㅜㅡ. 아무래도 처음에 분류한 조류학자 마음이겠죠^^;
    그런데 매사냥에도 황조롱이를 쓰네요. 사진에 왜 황조롱이(매과)가 있는것일까요.맨 아래사진부터 새매(어린새)->참매(1년생)->황조롱이(어른새)로 봅니다^^
    p.s
    정겨운게시판에도 소개해주세요!!!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 sagang 2010/02/23 08: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새박사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려.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왜 참매를 수리과에 두었는지. 구봉정님 말씀대로 처음 분류한 사람 마음이었겠지요. 황조롱이도 사냥에 쓰긴 한답니다. 사냥 기술은 그리 신통하진 않은가 봅니다. 암튼, 응사가 사는 집에 갔더니 황조롱이를 밖에 묶어놨더라고요. 제 눈에는 가장 이뻐 보였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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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중략)
“중립국이라지만 막연한 얘기요. 제 나라보다 나은 데가 어디 있겠어요. 외국에 가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지만, 밖에 나가봐야 조국이 소중하다는 걸 안다고 하잖아요? 당신이 가슴에 품은 울분은 나도 압니다. 대한민국이 과도기적인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는 걸 누가 부인합니까? 그러나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 생활과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은…”
“중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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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포로수용소를 재현한 모형이고 아래는 당시와 같은 모습으로 지어놓은 천막막사

거제포로수용소라는 단어는 늘 이명훈이라는 이름을 동반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속의 가상인물이지만, 소용돌이 치는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민족의 질곡을 고스란히 겪은 상징적 이름이기 때문이다. 남과 북, 그리고 전쟁을 차례로 경험한 그는 조국에서의 삶을 거부하고 제 3국행을 택했다. 제3국이라니…. 민족이란 이름을 오밤중의 등불처럼 앞세우기 좋아하는 이 땅 백성의 상식으로는 비극적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남이든 북이든 주어진 광장에서는 국외자처럼 맴돌다가, 자신의 틀에 맞는 광장만 찾으려한 기회주의자라는 칼질 따위가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일까. 경남 거제시 시청로 302번지. 그곳에는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이 있다. 아픈 역사가 박제가 되어 걸려 있는 곳이다. 온갖 전시물을 좌판처럼 늘어놓은 한쪽 구석에는, 미처 흔적을 지우지 못한 포로수용소의 잔해들이 어색한 몰골로 서있다. 곳곳에 배어있는 상처의 흔적은 아직도 찬바람에 서럽다. 그 어느 전쟁인들 총칼 들고 죽어가는 당사자의 손으로 시작한 적이 있던가. 부모 봉양하고 자식 키우는 걸 낙으로 알았던 장삼이사들이 스러져간 곳. 그들의 억울한 넋이 낡은 시멘트벽에 기대어 통곡하고 있다. 핏빛으로 각인된 아픔조차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점점 지워져가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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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거제도에 수용소를?

전쟁은 국가 간에 싸우든 내전이든 반드시 포로를 만들어낸다. 6.25전쟁 역시 다르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개전 이후 첫 포로가 수용된 곳은 대전포로수용소였다. 그때만 해도 몇 명 되지 않는 규모였으니 그리 골치 아플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선이 남쪽으로 밀리면서 포로수용소 역시 대구, 부산 등으로 남하하게 되었다. 그것도 잠시. 9월 15일에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포로를 양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파죽지세의 북진이 시작되면서 포로수용소도 북으로 북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번엔 중공군이 전세를 뒤집어놓았다. 후퇴 행렬을 따라 남하하던 포로들은 결국 부산에 집중됐다. 유엔군사령부에게는 전쟁도 전쟁이지만 포로대책을 찾는 것도 만만치 않은 숙제였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지고 육지와도 격리된 섬으로 포로를 모아 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1차로 거론된 곳이 제주도였다. 하지만 이미 제주에는 많은 피난민들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수용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또 부산에서부터의 이동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대안을 모색하던 끝에 찾아낸 곳이 거제도였다. 물론 그 당시 거제도는 다리가 놓이지 않은 섬이었다. 또 육지로부터의 이동 거리 등에서도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란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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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포화상태가 돼버린 섬

거제도가 포로수용소를 세울 장소로 결정되면서 1951년 초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처음 구상은 6만 명 정도를 수용한다는 것이었지만, 결국 22만 명 수용규모로 확대됐다. 먼저 도착한 포로들은 자신들이 수용될 곳에 울타리를 만들고 철조망을 설치하는 작업을 했다. 거제도 들판은 금세 천막으로 뒤덮였다. 막사는 처음에는 천막들뿐이었으나, 해가 지나면서 흙벽돌로 구조물을 쌓았다. 또 3,000개의 침대를 보유한 제64야전병원과, 2,500개의 침대를 가진 2개의 별관부속병원(요양소)이 설치됐다. 공사를 시작한 것과 거의 동시에 부산에 있던 포로들이 수송되기 시작, 3월 말까지 약 10만 명이 이송됐다. 포로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설 정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수용소는 갈수록 만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을 관리하고 통제할 인력은 그만큼 늘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포로 이송은 계속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인민군 15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등 17만 3천명의 포로가 수용됐다. 그 중에는 여자포로 300명도 포함돼 있었다. 여기에 포로를 경비하는 부대병력과 행정인원 등이 합쳐지면서, 약 10만 명이었던 거제도 인구가 금세 세배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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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들, 수용소에 해방구를 만들다

처음 몇 개월간은 비교적 평온했다. 가끔 경비병과 포로 사이에 사소한 충돌이 발생하기는 했으나 대부분 우발적인 것이었다. 포로들의 집단 저항은 1951년 6월부터 서서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북한군 장교 포로들이 수용된 제7구역의 제72소구역에서 맨 먼저 문제가 발생했다. 위생검사와 급식문제가 발단이 되어 포로들이 식사를 거부하고 소요를 일으켰다. 소요가 과격해지자 경비병들이 사격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3명의 포로가 죽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내에 소위 ‘해방동맹’이라는 비밀 조직체를 만들기도 했다. 그들이 조직화된 뒤 벌인 최초 행동은 수용소 내에서 ‘적기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별 제재가 없자 인공기를 게양하고 인민군 복장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특히 포로교환문제가 표면으로 떠오르면서 소요와 유혈사태는 가열되기 시작했다. (소요의 원인과 관련 포로들에게 귀환을 포기시키려고 협박과 고문을 하자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주장과, 고문 주장 자체가 날조며 평양 측의 지령에 따른 조직적 반란이었다는 반박이 대치하고 있다.) 결국 이런 사태는 당시 포로수용소장이었던 F.T.도드 준장 납치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납치사건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포로수용소의 실정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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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공-반공포로, 또 하나의 전쟁

수용소에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가 혼합 배치돼 있었다. 반공과 친공의 성분이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은데다가 수용소를 관리하는 미군이 이 문제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친공과 반공세력 간에 대립이 격화됐다.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반목의 골은 갈수록 깊어졌고, 구실과 기회만 있으면 습격과 난투극이 이어졌다. 이에 따라 수용소 각 구역별로 친공 또는 반공의 색깔이 입혀지기 시작하였다. 즉, 어느 구역에서 친공세력이 통제권을 장악하면 그 수용소는 친공구역이 되고, 반공세력이 그 곳을 장악하게 되면 반공구역의 성격을 띠게 되는 식이었다. 친공포로에 의한 대표적 반공포로 학살은 1951년 9월 17일에 일어났다. 이날 밤 친공포로 측 해방동맹 본부에서는 "부산이 북한 공산군 수중에 들어 왔으며, 그 중 선봉대 1개 대대가 거제도에 상륙하여 포로들을 해방시키려고 전진 중에 있다." 고 선전했다. 이와 같은 선동에 자극된 친공포로들 중 일부가 반공포로들을 운동장으로 끌어내어 타살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로 전 수용소에서 희생된 숫자는 무려 300명에 달했다. 9·17사건이라 불리는 이 폭동은 20일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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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남으로,혹은 제3국으로

유혈사태가 극심해지자, 그 대응책으로 나온 것이 포로들의 분산이었다. 그 결과 친공ㆍ반공포로는 따로 수용되게 된다.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양측은 부상을 입었거나 병든 포로를 우선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본격적인 포로송환은 1953년 8월5일부터 시작됐다. 북으로 송환을 희망하는 친공포로는 대부분 거제도와 제주도에 수용되어 있었으므로, 해로와 육로를 통한 일련의 수송 작전이 전개됐다. 이 송환 작전은 한 달 넘게 계속돼 9월 6일 완료되었다. 물론 반공포로들은 대부분 남한에 남았다. 하지만 남도 북도 희망하지 않은 이들은 제 3국(인도→브라질)으로 떠났다. ‘광장’ 속의 이명훈도 미지의 세계로 가는 배를 탔다. 결국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이명훈의 비극이야 그렇다고 쳐도, 무사히 제3국으로 간 사람 중 그 누구도 이상향을 만났다는 소식은 없었다. 조국과 민족을 버리고 개인의 안위만 추구한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 한 이들도 있다지만, 따지고 보면 조국을 선택할 수 없었던 그들이야말로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닐까. 포로들이 떠난 뒤 용광로처럼 들끓던 수용소는 폐쇄되고 찾는 이 없는 마당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부르며 죽어간 이름 없는 포로들의 피를 양분삼아….

참고자료 :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홈페이지,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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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만석 2010/02/03 08: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탄과 총알이 휘갈겨지는 전투현장보다 더 참혹한 현실이었을것 같습니다. 내일이 입춘입니다, 봄이 무척 그립습니다.

    • sagang 2010/02/03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지루하네요. 세상이 그런 게 아니라 제 안의 제가 그렇겠지요. 그래서 저도 봄이 무척 그립습니다. 비단 같은 햇살이 내리는 들판에 서고싶은 요즘입니다.

  2. 고마마 2010/02/04 1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곳이 있었군요.
    녹이슨 철조망과 온통 회색빛인 흙벽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욱 불러 일으키는 것 같네요.
    취재를 위해 거제도까지 다녀오셨겠죠,
    고생 많이하셨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 sagang 2010/02/05 08:53  댓글주소  수정/삭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역사의 현장에 서면 늘 숙연해지는 그 무엇이 있지요. 낭비하듯 하루를 살아버리는 데 대한 반성도 많이 들고요. 거제는 아름답지만, 포로수용소에는 여전히 아픔이 배어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펌프보다는 뽐뿌라고 불러야 제 맛이 납니다.
펌프라는 말이 어떻게 뽐뿌가 되었는지 몰라서는 아니고요, 그렇다고 어릴 적 제가 살던 곳에서 그리 불렀다고 해서는 더욱 아닙니다.
억지 같겠지만, 뽐뿌라고 발음해야 뭔가 힘이 좀 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대지 깊숙한 곳에서 생명수를 불러내는 도구쯤 되려면 힘이 좀 있어야 하니까요.
물론 제가 사랑하는 건 물을 길어 올리는 도구, 즉 펌프의 실체지 이름 따위는 아닙니다.
펌프는 ‘기억창고’ 저 깊은 곳에 숨어있는 추억들을 퍼내어 햇빛 아래 널어놓는 마술 같은 존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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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프 하면 한 여름에 옷을 훌훌 벗고, 등목 하던 기억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겨울 풍경이 먼저 떠오릅니다.
어려웠던 추억이 더 뼛속깊이 고갱이로 박히는 모양이지요?
겨울아침이면 물을 데워서 펌프를 녹이는 게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전날 밤에 펌프 안에 고여 있는 물을 빼내면 얼 일이 없지만, 그걸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통째로 얼어버린 날은 팔팔 끓는 물을 몇 바가지 부어야 물을 펌프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얼음이 녹았다고 고역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펌프질을 할라치면 손이 쇠 손잡이에 쩍쩍 달라붙고는 했지요.
제 어머니 말씀대로 ‘징그럽게도 춥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다행이 물이 한번 나오기 시작하면 그런대로 고생은 끝납니다.
지구가 가슴에 품었던 물인지라,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를 정도로 미지근했습니다.
그 물을 받아서 세수도 하고 밥도 짓고 걸레도 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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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얕은 지식으로 펌프가 어찌 물을 끌어올리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하기란 난감한 일입니다.
기압의 차이를 이용해서 유체를 이동시키는 원리일 거라고 짐작할 뿐이지요.
펌프 안에는 바깥 공기가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는 고무 패킹(packing)이 있습니다.
펌프질을 하면 관에 있던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그 아래에 있던 물을 끌어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펌프를 설치하는 방식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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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맥이 흐르는 곳까지 관을 박거나, 기존의 우물에 관을 넣고 뚜껑을 덮는 방식이지요.
지하수 사정이 안 좋은 동네는 샘도 관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맥을 찾거나 펌프를 설치하는 일이야말로 전문가의 몫이었습니다.
어느 집에 펌프를 박는다고 하면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구경을 갈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지요.
어찌어찌 설치한다고 해도 속을 썩이는 펌프가 없지 않았습니다.
한번 쓰고 나면 물이 저절로 빠지는 것도 많았는데, 그런 땐 마중물을 부어줘야 했습니다.
마중물을 붓고, 빠르게 펌프질을 하면 어느 순간 저 깊은 곳의 물과 만나는 느낌이 전해져옵니다.
웃물이 관을 타고 내려가서 아랫물을 데려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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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여름이 되면 펌프에 매달려 놀았습니다.

땅속에서 퍼 올리는 물은 냉장고에 보관한 것만큼이나 시원했지요.
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쓰기도 하고, 아예 큰 ‘다라’에 받아놓고 철퍽거리기도 했습니다.
한손으로 펌프질을 하면서 다른 손으로 구멍을 막았다가 물을 받아먹는 재주쯤은 누구든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터에서 돌아온 어른들도 웃통을 훌훌 벗고 펌프 앞에 엎드려 등목을 하고는 했지요.
어푸! 어푸! 쏟아지는 비명에 펌프질은 더욱 신명이 붙었습니다.
먼 길을 다녀온 아버지는 마루에 앉자마자 시원한 물 한 잔을 청하시고는 했습니다.
그러면 펌프질을 한참 해서 관에 고였던 물을 빼낸 다음 한 바가지 떠다 드리지요.
땅 속 깊은 곳의 물을 불러내지 않으면, 미지근하거나 녹 냄새가 나기도 하니까요.
“어이, 시원하다” 한마디로 하루의 고단함을 내려놓을 때, 이유 없는 안도감이 전신을 감싸고  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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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시골동네를 지나다, 어느 집 마당에서 녹슬어 가는 펌프를 만나는 적이 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손잡이를 잡아보지만, 쿨럭 쿨럭 해소기침이나 쏟아낼 뿐입니다.
저 깊은 곳에서 땀으로 길어내던 생명력, 그 물이 그립습니다.
발가벗고 깔깔거리던 여름날뿐 아니라 손이 쩍쩍 달라붙던 한 겨울의 풍경마저 애틋해지는 건, 나이 먹는 탓만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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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미예 2010/01/18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린시절 등물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잘보고 갑니다. 즐거운 한 주 되세요.

    • sagang 2010/01/18 1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지요.
      그런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고요.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행복한 날들 되시길.

  2. 김만석 2010/01/19 07: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뽐뿌'에서 나오는 굵고 시원한 물소리는 저도 아직 생생합니다.
    펌프안에 물을 올려주는 검정색 고무패드도 닳아지면 물이 잘 안 올라오지요. 80년대 초반쯤으로 기억나는데, 우리동네 우물파는 집이 한 집이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까지 물려 받았는데 "이제는 우물파서는 먹고 살기 힘든데..."하는 푸념이 생각납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물을 파서 먹고 살았습니다. 상수도는 생각도 하기 힘든 동네가 많았으니까요. 여전히 그 때의 서민들은 지하수에 의존해야 했기때문에 서수남,하청일의 한일자동펌프가 우물파는 사람들의 생계를 이어주었지요. 행복한 한 주 출발합니다.

    • sagang 2010/01/19 0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보다 더 많은 추억을 갖고 계시는군요. 하긴 물이야말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필수요소니까요. 물이 흔전만전인 동네가 있는가 하면 달동네 같은 곳은 물 한모금에 목숨을 걸 정도로 물이 귀했지요. 그런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데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3. wheelbug 2010/01/19 0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골 할머니 집에서 처음 봤던 뽐뿌에 대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말라있던 뽐뿌에 마중물을 붓고 재빨리 손잡이 끝을 끌어올렸다 내렸다 합니다. 말 그대로 뽐뿌질이지요. 그러면 신기하게도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그런 뽐뿌를 보는 것도 잠시... 시골 집도 한일모터펌프로 교체된 지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는 옛 뽐뿌를 박물관에나 가야 찾아볼 수 있게 됐으니.....

    • sagang 2010/01/19 09: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들에게는 뽐뿌질이 꽤 재미있었지요. 힘든 줄도 모르고 물을 퍼내고는 했습니다. 지금처럼 상수도세가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어른들도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특별이 물이 부족한 동네가 아니고서는... 한일모터펌프... 한 때 히트작품이었는데... 요즘은 그것도 보기 힘들겠지요?

  4. 승기 2010/02/04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번째 사진은 그림 같군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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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구산(三龜山)을 휘감고 흐르는 와룡천(臥龍川)은 강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좁고 내라고 하기에는 너무 넓었다. 삼구산의 깊은 골 덕분에 상류에는 용소(龍沼)나 선녀못처럼 제법 깊은 소도 몇 개 거느리고 있었고 물 역시 사계절 흔전하게 흘렀다. 수면은 늘 잔잔해서 어지간한 비에도 범람하는 법이 없었다, 덕분에 강을 따라 길게 형성된 마을, 너른말에서는 가뭄이나 홍수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만한 그림자도 있는 법. 와룡천의 혜택으로 사는 마을사람들에게도 불편한 점은 있었다. 강을 건너야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외나무다리나 징검다리를 놓기에는 수량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남은 수단이 나룻배를 띄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마을에는 대대로 나룻배와 뱃사공을 두었다. 지금의 사공 천먹보의 아비도 할아비도 사공이었다. 사공은 보통 자식에게 물림 되는데, 소‧돼지 잡는 백정처럼 천민 취급을 받았다. 그게 싫었던 천먹보는 미처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마을을 떠나 도시를 떠돌았다. 하지만 그 역시 사공의 운명을 거스르지 못했다. 피의 부름을 받기라도 한 듯, 어느 날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비의 오랜 손때가 묻은 삿대를 잡았다. 그의 아비는 며칠 뒤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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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먹보와 그의 아들 수길이가 사는 사공막(뱃사공이 거주하기 위해 나루터 근처에 지은 집)은 강가 억새밭 사이에 숨듯 엎드려 있었다. 강 저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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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면 언제든지 배를 띄워야 하기 때문에, 사공막은 강과 최대한 가까워야 한다. 말이 집이지 두엇이 간신히 발을 뻗을 수 있는 방 한 칸과 추녀 밑에 소꿉장난처럼 늘어놓은 부엌살림이 전부였다. 천먹보에게도 아내가 있었다. 하지만 몸이 약했던 그녀는 아이를 낳다가 죽고 말았다. 아내를 잃고 아이를 얻은 천먹보는 갓난아이가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젖동냥을 해야 했다. 불쌍하다고 두말 않고 젖을 물리는 아낙들도 있었지만, 상것에게 젖을 물릴 수 없다고 내치는 집도 없지 않았다. 아이 배를 채우려니 날마다 마을을 몇 번씩 왕래해야했다. 자신이 굶는 적은 많았어도 아들의 끼니를 거르게 하는 경우는 없었다. 덕분에 수길이는 배를 곯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 집안의 피를 이어받아서 기골이 장대했고 또래 중에 힘도 가장 셌다. 여덟 살 되던 해에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상놈이 어쩌고 양반이 어쩌고 하는 구습이 희미해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걸 뭐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사공의 신분이 산꼭대기까지 올라간 것도 아니었다. 나이가 많건 적건 누구나 “어이~ 먹보! 강 좀 건네주게”하고 말끝을 잘라먹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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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외지에 나갈 때는 사공막을 들르게 마련이었다. 마을에 들어오는 사람도 사공막 쪽에다 “어이, 사공” 소리를 질러 배를 청했다. 천먹보는 집 옆에 돗자리 서너 장만하게 일궈놓은 텃밭에서 풀을 뽑다가도 강 건너에 사람 기척이 보이면 얼른 달려가 배를 띄웠다. 아이들 역시 학교에 갈 땐 나룻배 앞에서 줄을 섰다. 배를 띄울 만큼 모이면 용케 알고 천먹보가 사공막에서 나왔다. 배는 손바닥만큼이나 작아서 등하교 시간에 아이들이 몰리면 두세 차례 왕복해야 했다. 하지만 천먹보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그는 특히 아이들을 좋아했다. 작은 아이들은 하나씩 안아서 배에 태우고 내려줬다. 아이들의 신발이 물에 젖기라도 할까봐 늘 조심했다. 아이들도 먹보아저씨를 잘 따랐다. 집에 맛있는 게 있으면 몰래 가져와 살짝 건네주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러면 천먹보는 “너희들이나 먹지, 이런 걸 왜 가져오냐?”며 껄껄 웃었다. 장마철에 배를 띄우지 못하거나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지 않는 한 그의 배는 늘 부지런히 강을 오갔다. 뱃삯은 배를 탈 때마다 내는 건 아니었다. 너른말에서는 봄, 가을 추수철이면 곡식으로 뱃삯을 추렴했다. 배에 문제가 생겨 수리하거나 새로 만들어야 할 때도 마을 공동으로 비용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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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먹보는 학교를 오갈 때가 아니면 수길이가 배 근처에 가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선언하듯 말했다.
“우리 수길이는 절대 사공을 시키지 않을 거여. 대처에 나가서 펜대를 잡고 살게 할 것이여”
할아비도 아비도 자신도 천형처럼 사공으로 살았지만, 자식에게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그의 의지는 굳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수길이 역시 펜대가 아닌 삿대를 잡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수길이는 제 아비의 원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사공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언젠가 천먹보가 사공막을 잠시 비운동안, 급하게 바깥에 나가야 할 사람이 배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보다 못한 수길이가 밧줄을 푸는 참에 아비가 돌아왔다. 아들이 배를 띄우려 하는 것을 본 천먹보는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 펄펄 뛰었다. 평소에는 소처럼 순하다가도 한번 화가 나면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는 그의 성격을 아는 동네 사람은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결국 수길이가 다시는 배를 만지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 다음에야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래도 불안했던 천먹보는 그날 저녁 아들을 앉혀놓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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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먹보가 앓아누운 건 장마가 한창이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평생 고뿔 한번 안 앓던 그가 한 여름에 앓아누웠으니, 개에게 뿔이 난 것만큼이나 놀랄 일이었다. 하지만 수길이 외에는 누구도 천먹보가 앓아누운 걸 알 지 못했다. 강물이 많이 불면 배를 띄우는 게 위험하기 때문에 사공막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때 사공막은 섬이 되었다. 중학생이 된 수길이가 방학을 맞아 집에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수길이에게도 앓아누운 아비를 일으켜 세울 만한 재주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항우 같았던 아비가 기신을 못하고 있으니 뭘 어찌해야 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이었다. 수건에 물을 묻혀 아비 머리에 올려놓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천먹보는 다음 날에도 일어나지 못했다. 열이 펄펄 끓는데도 겨울이불을 몽땅 내오라 해서 덮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고 신음이 그치지 않았다. 수길이가 쌀을 불리고 불을 때서 죽이라고 쒀다 디밀었지만 수저조차 들지 못했다. 가끔 급한 숨을 몰아쉬는 바람에 수길이가 깜짝깜짝 놀라고는 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 양지벌 그 넓은 들이 물을 한껏 들이켜서 땡땡한 배를 내밀고 널브러져 있었다, 그나마 장마가 시작될 기미가 보이면서 천먹보가 배를 끌어올려놓은 게 다행이었다. 수길이가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온 건 또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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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배가 묶여 있는 바로 아래까지 차 있었다. 삼구산에서 훑어왔음직한 벌건 흙탕물이 혀를 날름거렸다. 수길이가 밧줄을 풀더니 배를 물 위로 띄웠다. 배에 올라타 삿대로 강바닥을 밀어봤지만 앞으로 나가기보다 자꾸 아래로 밀려 내려갔다. 노련한 사공도 빨라진 물살을 헤쳐 나가기 쉽지 않을 텐데, 삿대 한번 잡아보지 못한 아이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그나마 유달리 센 힘 덕을 보는 셈이었다. 배가 건너편 언덕에 도착했을 때는 사공막이 아득하게 보일 정도로 한참 떠내려간 뒤였다. 시간도 꽤 흘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이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조금만 더 내려가면 물살이 걷잡을 수 없이 급해지는 여울목이었다. 끙끙거리며 배를 끌어올려 미루나무에 묶은 아이가 내처 달리기 시작했다. 읍내에 가서 약을 사올 모양이었다. 한참이 지난 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아이가 배를 묶어둔 곳으로 돌아왔다. 약봉지를 싸서 갈무리한 가슴께가 도드라져 보였다. 강물은 여전히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이가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배를 다시 띄웠다. 삿대질에 따라 배는 조금씩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건너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래로 떠내려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삿대질에 서투른 아이가 그 상황을 역전시키기에는 무리였다. 더구나 빈속에 비를 맞으며 먼 길을 달려갔다 오느라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통제를 벗어난 배가 어느 순간 여울목으로 빨려들더니 퉁탕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아이가 재빨리 삿대를 여기저기 찔러 넣어봤지만, 배를 더욱 요동치게 만들 뿐이었다. 절망감이 아이의 눈을 스치면서 손은 저절로 약봉지가 들어있는 가슴께를 더듬었다.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배가 핑그르르 도는가 싶었는데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 손 하나가 몇 번 안타깝게 수면 밖을 할퀴는가 싶더니 곧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오후 비가 그친 뒤, 한 사내가 기다시피 강둑을 내려가고 있었다. 금세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던 천먹보였다. 수길아!! 수길아!! 울부짖는 소리가 황소울음처럼 강을 건너 들판을 달려 나갔다. 하지만 잠시 뒤 돌아온 건 빈 메아리뿐이었다. 아이도 배도 없는 강변에 황금빛 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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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엘로이즈 2010/01/04 2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째 이리 슬프디 슬픈 내용인지.. 실화는 아니겠죠?

    소설을 쓰셔도 참 좋겠다는 생각을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했더랬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사진은 어딘가요? 삼구산 와룡천으로는 어딘지 감이 서지 않습니다. 충청도 어디메겠죠?

    • sagang 2010/01/05 0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실화는 아닙니다. 제가 책 세권을 낼 정도로 많은 실화를 알 수는 없는 일이니. 하지만 상황 자체가 허구는 아닙니다. 제 흥에 겨워 후세들에게 거짓말을 들려줄까봐 늘 노심초사하지요.

      사진은 안동 하회마을입니다. 요즘 실제로 노를 저어 강을 건너다니는 마을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2. 김만석 2010/01/05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동하회마을이었군요, 눈에 많이 익었습니다. 첫번째 사진은 제가 2년전 겨울에 들러 찍은 배경과 무척 닮아서 혹시나 했습니다.
    그 때는 빈 나루터에 사진에 보이는 배만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똑같은 배경을 담았는데 어찌나 이리도 다른지......부럽습니다.

    • sagang 2010/01/06 0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빈 나루터의 배도 나름대로 좋은 풍경이겠네요. 하회마을의 풍경 중에 저 나룻배가 있는 풍경을 가장 좋아합니다.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질리지가 않습니다.

      김만석님이 찍는 사진이나 제가 찍는 사진이나 똑같을 겁니다. 사진을 자꾸 찍다보면 각자가 원하는 스타일이나 색감이 나오게 마련이지요.

  3. wheelbug 2010/01/05 17: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구라지만 코끝이 찡해집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들 하지만 아직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천한 뱃사공 일을 자식에게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수길이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천먹보가 아픈 애비를 위해 배를 띄운 수길이를 부둥켜 안고 화해하는 모습으로 상상하는 게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 sagang 2010/01/06 09: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님의 말씀대로 화해하거나 접점을 찾는 모습으로 그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운명론에 입각한 글쓰기였습니다. 운명을 거스를 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그리고 싶었달까요. 순응하며 살 수만도 없지만, 인위적으로 운명을 바꾸려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최근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지요. 좀 더 밝은 상황을 그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